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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일 : 09-04-13 12:49
바람같은 마음으로 바람을 만난 날의 단상
 글쓴이 : 김옥진
조회 : 22,059  
 

바람같은 마음으로 바람을 만난 날의 단상


몇주째 진행한 상담일정이 예기치 못한 일들로 자꾸 어긋나서,

교수님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로 마치기로 했다.

그런데 오늘은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조금 더 솔직해 보자란 마음에

억누르고 있던 마음을 마구 쏟아내었다.

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것 같은 무력감에 빠뜨리고서도

끝끝내 미안하다는 말한마디 하지 않는 본성을 보며,깊은 한숨을 쉰다.

후련하지가 않아 그길로 내처 문수산으로 발길을 돌렸다.

계획되어지지 않은 산행이었다. 


어딜가도 요즘처럼 화려한 계절은 없다.

이곳저곳 둘러봐도 산 얼굴이 잔뜩 화장을 하고 있다.

거뭇한 나무등걸과 퉁박스럽던 산에 여기저기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 다감한 표정을 만든다.

그립던 사람 만나듯 가슴이 두근두근 바위 뒤 소나무 밑에서 요술처럼 피어올라

연분홍으로 산을 물들인다.


아직 시절은 봄인데도 후텁지근한 날씨는 여름의 문턱이다.

등산로를 정비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오른쪽 급사면으로 올라 서서

벼랑 위로 난 아슬아슬한 등산로를 지난다.

쉬엄쉬엄 1시간 가량 오르고 난 뒤 만나는 고갯마루에 선다.

시원한 골바람이 골짜기를 타고 불어온다.

산 길 가에 여러 색깔의 봄꽃들이 지나가는 나를 반긴다. 


진달래꽃이 만발한 즈음이면 숫제 멀미가 날 지경이다.


그러나 이곳은 진달래가 그다지 많지는 않다.

꽃길은 이따금씩 산허리를 가쁘게 돌아가기도하고, 때로는 아득한 벼랑 위로 올라서기도 한다.

더군다나 바위 틈 사이로 간간이 드러나는 풍광은 날아가 듯 상쾌하다.

-이지누의 <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>중에서-글귀가 생각이 난다.

언젠가 산길을 걷다가 바람을 본 적이 있다.

하지만 바람, 그 자체로서 그를 본 것은 아니다.

나뭇잎이 살랑대거나,

길 섶에 우뚝 선 목이 긴 원추리가 흔들거리는 것을 통해

비로소 바람을 보았던 것이다.

땀으로 젖은 내 살갗에 바람이 닿았을 때


이윽고 그가 바람이 되었듯이 사람 또한 다르지 않다.

나 이외의 또 다른 사람이 있어야만 그제사 나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.


산이라는 공간에서는 물질의 생성과 소멸이 이루어지는 리듬을 경험해야 한다.

산 속의 지속되고 있는 리듬의 완만한 흐름과 같다.

사람들이 산 속에 들어가게 되면 태도는 단순 명료해진다.

산은 사람들을 자연 그 자체가 되도록 하면서 길들인다.

산길을 걸을 때 몸은 낮고 마음은 깊어야 한다.

몸을 낮춘자가 한 걸음씩 걸어서 깊은 곳에 당도한다.

낮은 몸이 산 길을 딛고 나아갈 때,

마음 속에서는 또 다른 길이 열린다.


세상의 길은 굽이굽이 에돌아 마음의 길에 닿는다.

그 때, 세상은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오고,

마음은 세상의 길 위로 퍼져 나간다.


바람을 만나고 비로써 마음속의 바람이 조금 잡혔다.